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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눈보라가 몰아친다. 반쯤 우박으로 변한 눈 알갱이가 북서풍에 떠밀려서 창을 때리고 흔드는 소리에 잠에서 깨곤 한다. 우리 집은 지은 지 20년이 넘었다. 제주의 북서쪽 바다를 면하고 있어서인지 창틀이나 외벽, 문손잡이 등이 나이보다 낡아서, 겨울이면 금 간 벽과 벌어진 창 틈새로 거칠고 찬 북서풍이 ‘휘유 휘유’ 휘파람을 불면서 드나든다. 카디건을 두르고 마루로 나가서 실내 온도를 확인하니 섭씨 15도. 시각은 5시 30분. 어제는 14도까지 내려갔다. 뜨거운 물로 보이차를 내려서 남편과 마주 앉아 음악을 듣는다. 어둑한 새벽에 잠에서 깨기 위해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이다.
계절과 시간대와 기분에 맞춰서 음악을 고르는 데 뛰어난 선곡가인 남편이 오늘은 카탈루냐 출신의 트럼본 연주자이자 보컬인 리타 파예스(Rita Payes)와 클래식 기타리스트 엘리사베트 로마(Elisabeth Roma)의 앨범 『Imagina』를 틀어줬다. 스피커 너머로 텅 빈 공간에서 울리는 기타와 나지막한 목소리와 트럼본 소리가 들려온다. 어깨에 힘을 쭉 빼고 두런두런 친밀하게 대화해나가는 듯한 연주가 너무도 따뜻하고 포근해서 놀랐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엄마와 딸이었다. 엄마의 생일 선물로 구상한 작업을 발전시켜서 평소 둘이 아끼던 곡들을 지극히 사적으로 해석해 녹음한 앨범이라고 한다. 카탈루냐 지방의 자장가, 보사노바, 파두, 볼레로의 명곡이 리타 파예스의 긴 숨결을 타고 흘러나오는데, 트럼본 연주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피치가 조금씩 어긋나기도 하고, 음색은 흔들리고 갈라졌다. 정확하고 빈틈없이 완성된 연주와는 거리가 멀지만, 나는 그 불완전한 소리가 주는 푸근함에 오늘따라 무척 기대고 싶어진다.
귤 작업을 하다가 오두막에서 잠시 쉬던 때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화목 난로에 불을 지피면 작은 방 정도 되는 오두막 안이 금세 훈훈해지고 난로 곁에 앉은 친구의 볼은 사과처럼 ‘빠알갛게’ 달아올랐다. 각자 싸온 차와 커피, 군고구마, 상처 난 귤 따위를 주섬주섬 꺼내놓고 나눠 먹는 사이에 손때 묻은 장갑과 작업복에는 삼나무 향이 뱄다. 춥고 고된 노동을 잠시 멈춘 시간. 오두막 벽에,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언 손발을 녹이던 시간이 며칠 전인데 벌써 아득한 추억이 됐다. 따뜻한 숨 같은 차와 음악 덕분에 한결 부드러워진 몸을 일으켜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부엌으로 향한다. 음악도, 요리도, 사람의 말 한마디조차도 따뜻한 게 마냥 그립고 좋은 나날이다.
요 며칠 감귤을 잘못 받았다는 연락이 여러 번 왔다. 주문했는데 못 받았어요, 두 박스를 시켰는데 한 박스만 왔어요, 한 박스만 시켰는데 세 박스가 왔어요……. 실수가 하나, 둘에서 끝나면 그러려니 할 텐데 웬걸, 쌓이고 쌓여서 열 건도 넘게 실수한 걸 알았을 땐 할 말을 잃었다. 주문서를 펼치고서 멍청하게 눈만 끔벅끔벅했다.
실수한 주문들은 귤 작업 막바지에 몰려 있었다. 8톤에 가까운 귤을 따고, 포장하고, 보내고, 주문받는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나날을 열흘 가까이 보내고서 체력도 바닥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귤 창고 바닥이 무너지는(!) 어이없는 일을 겪으면서 반쯤 넋이 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해도 실수한 건 명백한 내 과실이었다. 신용을 잃은 걸 되돌릴 순 없는 법이다. 지금이라도 보내드릴 귤이 남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사과하면서 환불해드리고, 그럼에도 ‘맛있는 귤을 기대한 마음, 기다린 마음’에는 보상할 길이 없어 부끄럽고 죄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런데 모든 분이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가주셨다. 어떤 분은 건강 잘 챙기라는 말까지 덧붙이셨고……. 아, 이렇게 용서받는구나. 최선을 다했음에도 도저히 메울 수 없는 나란 사람의 빈틈을 누군가가 감싸주며 받아들인다. 그렇게 받아들여진 나는 전보다 겸허한 자리로 내려가서 다른 이의 모자람과 불완전함을 받아주는 사람으로 점점 변해간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나아가 세상사는, 누군가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감싸여 지탱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 연초부터 용서 카드가 열 장이나 모였어. 올 한 해 다른 사람들한테 많이 너그러워져야 할 것 같아” 하고 남편에게 말했더니 그는 싱글거리면서 감싸준다.
“그러지 마.”
날이 조금 풀려서 숲으로 갔다. 여전히 눈이 쌓여 있지만 오후의 볕이 닿는 나뭇가지에서는 눈이 녹아서 흘러내렸다. 그 소리를 녹음하려고 녹음기를 챙겨온 남편은 건전지를 두고 왔다며 제 머리를 주먹으로 콩콩 두드린다. 톡, 톡, 타닥, 타닥, 실처럼 가는 물줄기가 낙하해서 숲 바닥의 눈을 가볍게 때리고, 눈 이불에는 작은 동그라미 자국이 점점 많아졌다. 모닥불 피우는 소리, 작게 부딪히고 깨지는 소리, 녹아내린 물방울이 만나서 다른 눈을 녹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난생처음 눈이 녹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하얀 눈이 쌓인 숲속은 고요한 기쁨을 주었는데, 쌓인 눈이 온기에 녹아내리는 숲속은 나를 안심시켰다. 내가 눈을 반길 수 있는 이유도 돌아가서 언 몸을 녹일 따뜻한 집이 있기 때문이겠다.
숲길 끝자락에서 남편이 핏자국을 발견했다. 보현도 겁을 먹고 멈춰 섰다. 눈 위에 흘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선홍색 피가 군데군데 흩뿌려져 있었다. 핏자국을 따라서 숲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눈 위에 쓰러진 새끼 노루를 발견했다. 산짐승에게 당한 것 같았다. 가는 네 다리를 쭉 벋고 죽은 새끼 노루의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겁먹은 보현이 걱정돼서 조용히 뒤돌아 숲을 빠져나왔다. 아빠도 엄마도 없는 차가운 숲속에서 홀로 신음하다가 외롭게 죽었을 새끼 노루를 생각하자 하염없이 가엾고 쓸쓸해졌다.
농협 조합원에게 나눠준다는 쌀을 타오라고 남편을 읍내로 보내놓고서, 마루의 탁자 주위를 서성거리며 감귤 수확 철의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는데 남편의 귀가 시간이 한없이 늦어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하나, 야생동물구조센터에 지금 구조 요청을 해줄래? 다친 새 한 마리를 데리고 집으로 가고 있어.”
“정말? 알았어. 새 종류는 알겠어? 어떻게 다친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꽤 큰데 성조는 아니야. 교통사고를 당한 것 같아.”
서둘러 구조 요청을 해놓고 타월을 깐 종이 박스를 마련해서 대문 앞으로 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트럭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트럭이 도착했다. 종이 박스를 본 남편이 운전석 창문을 내리면서 소곤거렸다.
“그만한 박스로는 어림도 없어. 안을 한번 볼래?”
남편 다리 사이에 럭비공만 한 물새 한 마리가 앉아 아이팟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꽤 얌전하네.”
그러자 남편이 손을 내저었다.
“어휴, 난리도 아니었어. 음악 들려주고 조곤조곤 말을 건네서 겨우 진정시킨 거야.”
어린 새의 불꽃 같은 새빨간 눈에 야생성이 가득하다. 검은목논병아리로 밝혀진 아이를 구조대원에게 무사히 넘긴 남편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다시 싱글거리는 얼굴로 돌아와서 검은목논병아리의 번식과 양육 과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맘때 2년 연속으로 비슷한 장소에서 뿔논병아리와 검은목논병아리 유조(遺鳥)를 구조할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번식지와 가까워서가 아니겠냐며 그럴싸한 추론까지 했다. 가위 같은 뾰족한 부리로 공격하려는 새를 용감하고 슬기롭게 구조한 남편이 유난히 대견한 밤이다(입고 있던 패딩으로 새를 덮어서 눈을 가렸다고 한다).
“당신은 칭찬 카드 한 장이 생겼네! 언젠가 왠지 움츠러들 때 꼭 꺼내 쓰길 바랄게.”
아름다운 존재를 담아 고유한 세계를 여는 걸 좋아합니다.
제주에서 시를 쓰고, 감귤나무를 돌보고, 꽃을 하고 있습니다.
시집 『별사탕가게』 『아가풀과 노루별』을 발표했습니다.
제주에서 귤나무와 함께하는 시인 오하나의 1년 열두 달의 기록
“아늑한 숲과 투명한 바다, 싱그러운 귤나무의 소식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반려견 보현, 노래 만드는 남편, 고양이 자두와 황두, 멧비둘기 바비와 루시…
제주 북서쪽 바닷가에, 지은 지 20년이 넘은 소박한 집에 깃든 소중한 생명들
모든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고, 자연의 속도에 맞춰 호흡하고 감사하는 삶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