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계절이 왔다
내 가슴팍에 작은 화분 같은 공중이 생길 때 네가 그 공중에 씨앗 대신 묻은 네 눈빛이 자라 내 얼굴에 장미처럼 피고 진다.
김중일 「장미와 산다는 것」
사람의 일, 사람의 꼬리
사람이기에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을 슬픔이라고 불렀다 버리지 못할 슬픔을 사람의 꼬리라고 불렀다
유수연 「도리어」
잠시 멈춰 심호흡하는 여름밤
살아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이 여름날 무성한 나뭇잎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고, 땅거미 내린 뒤에 팔을 베고 누워 풀벌레 소리를 들으니 즐겁다.
양성우 「여름날 밤에」
내가 좋아하는 주홍
태양의 빨강도 별의 노랑도 끼어들지 않는 그 시간에 주홍이 태어났다고 주홍, 내가 좋아하는 우리의 얼굴
배수연 「주홍 이야기」
멀리 보니 보이는 것들
외등이 혼자 떨고 있는 골목길 내 가슴을 할퀴던 당신의 눈빛도 떠오른다 살면서 조금 더 먼데를 보는 일
황규관 「멀리 보다」
숨어 있을 곳이 많았다
다락이 있었다 창고가 있었다 지하가 있었다 골목이 있었다 단골이 있었다 슬픔이 있었다 거룩이 있었다 네가 있었다
유현아 「식상」
함께 가는 삶, 함께 가는 세계
그의 눈을 응시하며 함께 가고 싶다고 말했다 함께 가야겠다고 말했다
이종민 「투서」
사는 게 씁쓸하니?
그래 뭐 별거 있간디, 맹숭맹숭 싱겁게 나를 달래기도 하면서 조바심 낼 일도 성화 부릴 일도 없이
박성우 「머위」
끝까지 따스한 봄날이기를
소풍, 나뭇잎 한 장으로 수만 개의 태양을 가리는 시간 어쩌면 수만 개의 너
강성은 「봄」
시끄러운 세상은 돌아보지 마라
낙타 등에 올라 그 길을 느리게 아주 느리게 누가 혼자 넘어간다. 봄날 한채가 아득히 저문다.
노향림 「봄날 한채」
꽃 꽂고 놀던 아홉살 되어
그 오월 푸르던 날 오동나무 잎새 타고 흐르던 초승달 타고 하얀 꿈속으로 흘러가고 싶어요
김해자 「드림타임」
어긋나도 함께 걷는 사랑
나는 오리라 하였고 당신은 거위라 하였습니다 모양은 같은데 짝이 안 맞는 양말처럼
신미나 「사랑의 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