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언덕을 넘어오는 한 사람
노을 속에서 멀리 사랑이 보이지 붉게 타는 노을 사랑이 보이는 그 긴 언덕을 나는 사랑하지
장석남 「언덕」
공기는 다 기억하고 있다
공중의 공기가 유일하게 본뜨지 못하는 건 슬픔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기억해야 하는 건 슬픔의 감정이다.
김중일 「공기의 기억」
긍지를 향하여
여름은 타오르고 매미는 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제 몸을 거는 것 오랜 어둠을 지나온 목숨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황규관 「매미가 운다」
내가 나라는 실감 속에서
언제가 무심히 정지 버튼이 눌리는 순간이 오겠지 그 순간이 나의 자세, 나의 영원이겠지
안희연 「태풍의 눈」
망설이는 인간
하늘로 치켜세워야 할지, 땅으로 내려트려야 할지 모르는 빳빳하고 부드러운 동물의 꼬리 같은 이 우산을 언제까지 번갈아 쥐어야 하나
강우근 「우산을 어느 손으로 쥐어야 하나」
긴 장마가 끝나고
집에 가면 젖은 시간을 거꾸로 매달아야지 머금은 것 뚝뚝 다 떨어지라고 선풍기 바람에 말리고 뒤집어서 밤바람에 또 한번 말리고
송정원 「젖은 시간 말리기」
오늘 당신은 얼마나 살아 있습니까
밤 자전거 벨소리가 들린다 반대편 집의 불들이 하나둘, 켜진다 오늘은 내가 매번 살아 있고 그것이 이상하다
강지이 「수압」
시간은 우리를 기른다
우리가 저기 먼지 앉은 자그마한 걸상에 앉아서 작은 입을 벌리며 처음 노래와 글을 배우던 그토록 작었던 얕은 물에 놀던 어린 물고기 같았던 때처럼
송진권 「모교 방문」
지나간 뒤에야 알게 되는 것들
쌓은 적 없는데 쌓인 것들이 널려 있었다. 제 마음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끝내 무너짐으로 쌓이고 있었다.
유혜빈 「파도의 법」
당신이 비 오는 날에 오신다면
당신이 비 가운데로 가만히 오셔서 나의 눈물을 가져가신대도 영원한 비밀이 될 것입니다
한용운 「비」
가벼운 농담을 던지는 사람이고 싶어
손을 너무 세게 잡지도 말고 곧 놓칠 듯이 잡지도 말자 힘을 빼고 서로를 바깥으로 꺼내면서 걷자
오산하 「수목」
익숙하면서도 낯선 여름 풍경
매미 껍데기가 나무에 붙어 있었다 칼로 가른 듯 등이 반으로 갈라져 있다
신미나 「안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