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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 동안 한 도시에서 발행하는 매거진 에디터로 일했다. ‘사람 중심’이라는 시정 방향에 맞게 우리 곁에 살아가는 다양한 시민의 삶을 조명하는 매거진이었다. 그렇게 한 달 평균 서너 편의 시민 인터뷰 기사를 썼으니 3년 동안 100여 편의 기사를 쓰고, 100여 명의 사람들을 만난 셈이다. 매달 지켜야 할 몇 편의 마감이 있다는 건 부담되는 일이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해온 어떤 일보다 나는 이 일을 좋아했다. 그래서 2022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이 결정되었을 때 아쉬운 마음이 컸다.
마지막 호는 그동안 인터뷰한 이들 중 열 명을 다시 만나 근황을 듣는 특집 기사를 싣기로 했다. 지금까지 써온 기사를 살펴보며 내가 만나온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이산가족 부부, 환경미화원, 청년 농부, 댄서, 신인 배우, 이발사, 여자 야구단, 해녀, 글 쓰는 할머니, 마을신문 기자단, 환경운동가, 식당 주인, 간호사, 사회복지사, 동네 통장, 인쇄소 직원, 치어리더, 시니어 바리스타, 과일가게 사장님, 라디오 DJ 등…….
인터뷰가 시작되면 대상자와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두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가장 궁금해하는 사람이 된다. 내 이야기는 잠시 잊어버리고, 타인의 이야기가 더 중요해지는 드문 시간을 산다. 많이 웃고, 자주 벅차오른다. 특정 직업인을 만나는 날엔 그가 일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인물에 따라 집을 방문해 사진첩과 일기, 사연이 담긴 물건들을 보는 일도 있다. 인터뷰라는 일 덕분에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그리고 책상으로 돌아와 내가 본 만큼, 내가 이해한 만큼 기사를 쓴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한 사람의 세상으로 조심스럽게 초대받는 일이라는 걸 느끼면서. 물론 100여 명의 이야기가 동등한 애정의 크기로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 어떤 이야기는 대부분 잊어버리고, 어떤 이야기는 떠나가지 않고 나와 함께 계속 살아간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이 처음 지급되었을 때, 한 할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할머니는 동사무소에서 현금으로 재난지원금을 받았다. 지원금을 어디에 가장 먼저 쓰셨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곧장 시장으로 가 장을 보았다고 했다. 싱싱한 야채와 반찬거리도 사고, 쌀집에 들러 평소 사고 싶었던 우렁이 쌀도 한 포대 샀노라고. 그동안은 생활이 빠듯해 됫박으로만 쌀을 사던 할머니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 새 쌀로 지은 밥을 먹어보았더니 브랜드 쌀이라 그런지 어금니로 씹는 맛이 더 좋았다. 다음 날 할머니는 다시 쌀집을 찾아가 우렁이 쌀을 한 포대 더 샀다. 멀리 사는 여동생에게도 맛있는 쌀을 보내주고 싶어서였다. 남은 돈으로는 몇 년 전 자신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고마운 이웃을 찾아가 빚을 갚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할머니는 내내 무거웠던 마음이 날아갈 듯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후로 나는 재난지원금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모처럼 좋은 쌀을 사서 밥을 지어먹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진해 바다를 지나갈 때면 열여덟에 처음 물질을 시작해 45년 동안 해녀로 살아온 미숙 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미숙 님은 진해에 얼마 남지 않는 해녀 중 한 명으로, 그의 소원은 제 숨이 다할 때까지 해녀로 살아가는 일이다. 바닷속을 들어가 본 적 없는 나는 미숙 님이 들려준 이야기 덕분에 ‘깊지는 않지만 미역, 해삼, 멍게, 전복까지 골고루 다 있어 착한 진해 바다’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숨만큼 살다 오는 바다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마음을 느끼는지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다.
“사람 속보다 바닷속이 더 마음이 편안해. 그 안에서는 속상한 일도 다 남의 일처럼 되거든. 바다가 내 친구고 가족이야. 뭐 잡을라고 들어갔다가도 작은 물고기가 보이면 ‘아이고 니는 더 커서 사람들한테 잡혀가라’ 말 걸어보고. 내가 잡은 것도 좀 어리다 싶으면 ‘니는 더 있다 오너라’ 하면서 제자리에 놔두고 오고. 헤엄치다 올라와 보면 바위에 새가 혼자 앉아 있을 때가 있거든. 그러면 마음이 쓰여서 ‘니도 혼자가? 나도 혼잔데’ 하면서 미역이라도 먹게끔 바위에 올려다 주고 그러지."
동네를 걷다 화방을 발견하면 일흔일곱에 복지관에서 처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옥란 님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미술 선생님이 ‘옥란이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라고 칭찬해 주었던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던 그는 일흔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화방에 들어가 자신이 사용할 붓과 물감을 사보았다. 그 순간의 기쁨을 이야기하던 옥란 님이 얼굴을 기억한다. ‘조금 더 일찍 시작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없냐는 물음에 이제라도 시작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요, 라고 답하던 그분의 목소리도.
이산가족이라는 말을 들을 때 바로 생각나는 얼굴도 있다. 인터뷰 당시 94세였던 김 선생님은 70년 전 고향을 떠나던 날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의 고향은 평안남도에 있는 항구 도시로 부모님이 고향에서 과수원을 크게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님은 지금도 고향의 가을을 떠올리면, 창고에 사과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풍경이 생각난다고. 1.4 후퇴가 있던 1950년 12월, 수확한 사과를 그냥 두고 떠날 수 없었던 가족들은 장남인 선생님을 먼저 남쪽으로 보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 어린 네 명의 동생들을 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모두 길어도 열흘이면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그때 선생님의 나이는 스물둘. 그 길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긴 세월 동안 선생님에게도 가족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2000년 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대상자로 선정되었고, 얼마 뒤 북한으로 출발한다는 말에 선생님은 부산 국제시장으로 가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잔뜩 샀다. 그중엔 시계 다섯 개와 볼펜 50자루도 있었다. 왜 볼펜을 사셨냐고 물었더니 북한에는 좋은 볼펜이 없다는 말을 듣고 써보게 해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이후 선생님은 어떤 사유로 인해 이산가족 상봉대상자에서 제외되었고 선물은 전해주지 못했다. 이제 북한에 살아있을 거라 기대하는 가족은 90세, 88세가 되었을 여동생 둘뿐. 그마저도 볼 수 있을 거란 희망이 희박해진 선생님은 만약 동생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이 말을 가장 전하고 싶다고 했다.
“긴 세월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내 삶을 열심히 살았다. 너희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구나.”
그 후로 나에게 이산가족의 아픔은 김 선생님이 그리워하는 고향의 과수원 풍경, 전하지 못한 볼펜 50자루, 그리고 그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의 무게로 느껴진다.
하루는 동료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너는 이 일이 왜 그렇게 좋은 거냐고. 그때는 그저 사람들 사는 이야기를 듣는 게 재미있다고 대답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걸 대답하는 순간에도 알고 있었다. 왜 좋은지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워 그런 것일 뿐. 그럼에도 다시 대답해보자면…… 나는 그런 게 좋았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가 어떤 삶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감각하게 되는 순간이. 내가 모르는 인생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찾아오던 놀라움과 부끄러움. 그와 동시에 또렷하게 생겨나던 삶에 대한 애정과 의지가.
언젠가 인터뷰를 마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작가님, 오늘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살아가세요.”
앞으로도 잘 살아가세요. 나는 이 말을 “앞으로도 잘 들으며 살아가세요”라는 말로 바꿔 듣기로 한다. 잘 듣고, 잘 살아가기. 이런 일이라면 계속, 계속 잘 해보고 싶다.
내게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는 노트가 있다. 내가 이 삶을 계속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준 말들을 모아둔 노트다. 지금껏 쓴 많은 글들이 이 노트에서 시작되었다. 다음에 쓰게 될 글 역시 여기에 있다. 세 권의 산문집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작별 인사는 아직이에요』 『나의 두 사람』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