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비둘기 씨께
비둘기 씨, 잘 지내고 있나요?
제주는 어느덧 여름도 한풀 꺾인 느낌이에요. 미지근하던 바닷물이 이제는 조금 차갑다 싶어졌어요. 저는 여름에 틈만 나면 해수욕을 했더니 얼굴이 새까매졌답니다.
얼굴이 새까매진 것 말고도 저에게 작은 변화가 있었어요. 책방에서 수요일, 목요일 이틀 근무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조그만 중고차도 구했어요. 서점은 집에서 10분 거리, 당근 밭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곳이지만 찾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저도 속초에 가면 매번 들르는 서점이 있는데 제주에 여행 올 때마다 이 책방을 찾아오는 분들이 있대요.
매대 위에는 비둘기 씨가 얼마 전 편집한 따끈한 책도 놓여 있습니다. 수요일, 목요일엔 그 책을 제일 앞쪽으로 슬쩍 옮겨 놓지요. 제가 만들 책도 언젠가 이곳에 놓이길 바라는 마음도 음흉하게 품고 있어요.
며칠 전에 이웃집에서 무화과 한 바구니를 받았습니다. 동네 분들은 마당 한편 나무에서 열린 조금의 열매도 저에게 나누어주곤 해요. 저는 대신 그 집에 가서 어르신들이 필요한 것을 인터넷으로 주문해드리거나 핸드폰 사용법을 알려드려요. 무화과 집 할머니는 나훈아를 좋아하셔서 8월 달력 뒷면에 ‘유튜브로 나훈아 메들리 듣는 법’을 크게 적어 드렸어요. 마당에 앉아 할머니와 어깨를 들썩이며 <울긴 왜 울어>를 흥얼거렸답니다.
무화과는 혼자 먹기엔 너무 많아 잼을 만들었어요. 잼은 개봉하면 10일 안에 먹는 것이 좋고 뚜껑을 열지 않으면 3개월 정도 보존할 수 있대요.
3개월이 지나 11월이면 가을도 지나고 겨울 기운이 느껴지겠지요.
비둘기 씨는 11월의 책을 만들고 계신가요? 11월의 책뿐만 아니라 내년 봄의 책, 여름의 책도 만들고 계시겠죠.
지칠 땐 언제든 제주에 오세요. 비둘기 씨가 분명 좋아할 작은 해변을 알아뒀어요. 그 해변 앞에 당근 케이크랑 커피가 맛있는 카페에도 가고 서점 구경도 하고요. 이것저것 다 귀찮다면 그냥 뒹굴뒹굴하다가 몸이 가뿐하다 싶으면 슬렁슬렁 오름에 가요. 억새 핀 가을 오름이 참 좋대요.
그럼, 틈날 때 먼 곳의 소식 전해주세요.
제주에서 도요가.
익는다
처음 가는 낯선 길
멀기도 하다.
두 번 세 번 가는 동안
길가 쌀가게, 키 큰 가로수
눈에 익는다.
약국 간판, 모퉁이 구두 가게
눈에 다 익는다.
눈에 익어, 발에 익어
가까워진 길.
처음에는 낯설던 얼굴도
눈에 익고 귀에 익어
가까워진다.
점점 가까워진다.
- 이상교 「익는다」, 창비 『고양이가 나 대신』(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