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은 다음 날 아침을 위한 시간입니다.
자기 전에는 로메인이나 양배추, 브로콜리를 씻습니다. 여유로운 아침을 위해 물을 미리 사용합니다. 어떤 이는 아침밥을 지을 때 불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던데, 저는 물을 덜 쓰려고 합니다. 호텔 조식에서 만난 채소와 과일들은 늘 물기와 멀었습니다. 호텔 조식이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미리 씻어서 물기를 바짝 말려 놓았기에 맛있는 거라고, 흰 접시 위에 떠온 과일을 오물오물 씹으며 생각했어요.
채소마다 그에 맞는 세척법이 있습니다. 양배추와 브로콜리는 흐르는 물에 헹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동안 맹물에 그저 담가두어야만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집에 오기까지의 여정을 떠올려보면 쌓인 게 많을 듯합니다. 양배추는 반으로 쪼개서 물에 담가 몇 번을 헹굽니다. 다 씻은 양배추는 부족했던 물을 빨아들이며 다시 싱싱해집니다. 물기가 빠지도록 엎어둔 양배추의 심을 칼로 도려냅니다. 그리고 그 빈 곳에 물기를 머금은 키친타월을 끼워서 냉장고에 넣어둡니다. 오로지 나를 위해 양배추를 이토록 멋대로 다룹니다. 오랫동안 냉장고 안에 있던 양배추는 심지가 볼록해져 있습니다. 수분이 없으니 양배추 자신의 잎에서 수분을 끌어당겼을 테죠. 살던 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은 냉장고 안의 쪼개진 양배추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동안의 양배추를 위해, 그리고 그걸 먹을 나를 위해 수분을 추가해주는 일이 지난날에 필요한 법입니다.
브로콜리는 더 신경 써서 씻어야 합니다. 비닐봉지를 벗겨 물에 담그면 표면에 이상한 기름기가 뜹니다. 시간이 더해져야만 빠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몇 번씩 물을 갈아주고 담갔다가, 이제 됐다 싶을 때 대강 잘라두는 일을 심야에 미리 합니다. 브로콜리 손잡이(심지) 부분도 구워 먹으면 맛있습니다. 버리기에는 아까운 손잡이입니다. 다음 날 아침에 물기가 쪽 빠진 브로콜리를 다시 한번 칼로 썰어서 구워 먹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물을 마시고, 그다음에는 구운 채소를 섭취하려는 게 저의 작은 규칙입니다. 나와, 나의 위를 따로 생각해야 합니다.
로메인은 쉽습니다. 물로 몇 번 헹구고서 물기를 바짝 말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아침에는 이 일조차도 귀찮아서 단념하기 쉽죠. 전날 미리 채소를 씻어놓는 사람이 내 삶에 존재한다는 건 얼마나 경쾌한 일일까요. 이제 저는 그 일을 기꺼이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메인도 상추라서 먹으면 잠이 옵니다. 밤에 먹으면 불면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침에 먹기 위해서 밤에 씻어둡니다. 나에게만 익살맞은 사람이 된 기분이 꼿꼿하게 자라납니다. 로메인을 씹고 나서야 새로운 마음이 깨어납니다. 수분을 잔뜩 머금은 채소는 부러울 만치 꼿꼿하거든요.
퇴근길에 상추를 산다
야채를 먹어보려고
좀 건강해지려고
슈퍼에서 한봉지 천오백원
회원 가입을 하고 포인트를 적립한다
남들처럼 잘 살아보려고
어떤 이는 화분에 상추를 기른다는데
아 예뻐라 정성으로 물을 주면서
때가 되면 그것을 솎아 먹겠지
상추를 먹으면
단잠에 들 수 있다는데
상추가 피를 맑게 한다는데
나는 건강해질 것인가
상추로 인해
행복해질 것인가
밥을 데운다
냉장고에서 묵은 쌈장을 끄집어낸다
상추가 포장된 비닐을 사정없이 찢는다
찢은 비닐을 쓰레기통에 내동댕이치는 나는
행복해질 것인가
상추는 나를 사랑할 것인가
- 박소란, 「상추」, 창비시선 429 『한 사람의 닫힌 문』(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