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비둘기 씨께
비둘기 씨! 도요입니다.
제주는 지금 한창 귤을 따느라 바쁜 시기입니다.
비둘기 씨의 예상대로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왔더니 집 문 앞에 귤이 가득 담긴 노란색 콘테나가 메모도 없이 놓여 있었어요. 며칠 후 길에서 마주친 상문 아저씨가 “귤 맛 괜찮읍디까?”(귤 맛 괜찮던가요?) 하고 인사를 건넸을 때야 콘테나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귤 값을 하겠다고 새벽에 과수원으로 향하는 아저씨의 뒤를 따랐어요.
새벽에 내린 눈이 주황 귤, 초록 잎 위에 내려앉아 있었어요. 나무를 흔들었더니 가지에 쌓였던 눈이 ‘파시시’ 떨어졌습니다. 귤 가지를 그러모아 피운 모닥불에 언 손가락을 녹이면서 귤을 땄습니다. 하지만 제주의 추위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 눈은 금방 녹아내렸어요. (서울에도 눈이 많이 내렸다지요. 출퇴근길이 힘드셨겠지만 저는 서울의 일상 속에서 만나는 눈의 풍경이 그립습니다.)
제주 농사 중에 귤 농사가 제일 쉬운 일이니 안심하라고 했지만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귤을 따는 일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네 바구니를 채우고 그만 얼굴이 퀭해져서는 슬금슬금 나무 사이를 빠져나왔어요. 귤을 나르는 일을 해보겠다고 나섰다가 그 일은 더 힘들어 주문받은 귤 박스를 포장하겠다고 창고를 어슬렁거렸습니다. 택배 운송장에 적힌 주소는 대전, 서울, 부산, 경주, 포항, 전국 각지로 다양했어요. 정성스레 가꾼 열매를 얼굴을 알 수 없는, 하지만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일은 책을 만드는 일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책을 만드는 일만이 아니라 많은 일이 그렇겠지요?
과수원의 귤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비둘기 씨도 올해의 일들을 마무리하고 계시겠네요.
제주의 세찬 겨울바람은 을씨년스럽다가도 어떤 날은 바람 끝에서 멀리에서 오고 있는 봄이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러면 저는 매서울 수 없는 이곳의 겨울바람이 귀여워 가만히 웃게 됩니다.
우리 곧 만나겠네요. 바람이 세찬 날엔 방바닥에 누워 귤을 까먹고, 바람이 귀여운 날엔 바닷가에 가요.
마중 나갈게요. 게이트를 나오면 새까맣게 그을린 당신의 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제주의 도요로부터.
* 콘테나는 제주에서 귤을 담는 커다란 플라스틱 용기를 뜻합니다.
푸욱,
흰 눈이 세상을 덮어
아무것도 안 보여,
눈을 꼭 감은 것같이.
스륵,
이 눈 다 녹고 나면
세상이 다시 보이겠지,
눈을 반짝 뜬 것같이.
- 정유경 「조금은 닮았구나, 눈과 눈」, 창비 『까만 밤』(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