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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매번 떠올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말이 있다. 그가 쓴 산문집 『걷는 듯 천천히』에서 읽은 문장이다.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 나는 감독의 이 말을 믿음직해서 좋아한다. 나는 이 세계가 아름답다는 말보다 구질구질하다는 말에 더 마음이 가는 사람이고, 그럼에도 이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는 말이 내게는 결국 삶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도 귀하게 찾아오는 아름다운 순간을 글로 쓰고 싶어질 때마다 불현듯 깨닫곤 한다. 삶을 사랑하는 데 실패한 것 같은 날들에도 사실은 내가 이 삶을 계속 사랑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러한 순간을 누군가가 들려준 말과 이야기 속에서 만난다. 모두가 아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살면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의 말. 내게는 한 명 한 명 다르게 특별하지만 그 사람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결국엔 내가 아는 평범하고 특별한 사람들의 말. 예를 들면 이런 사람들의 말이다.
시장에서 조금 더 저렴하게 파는 생선을 발견하는 작은 행운에도 기뻐하는 사람. 여름에 계수나무 아래를 지나면 설탕 냄새가 난다는 걸 아는 사람. 아이가 스스로 열 걸음을 걸었던 순간을 올해 가장 행복한 일로 기억하는 사람. 극장에서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단역으로 출연한 영화의 엔딩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보고 나오는 사람. 어릴 적 어머니가 고생했던 시장에서 사 온 토마토를 씻다가 눈물이 핑 도는 사람. 긴급재난지원금으로 브랜드 쌀을 사는 사치를 처음 부려본 사람. 그 쌀로 지은 밥맛이 좋아 멀리 사는 여동생에게도 한 포대 보내는 사람. 청소 노동을 하며 관찰한 일들을 작은 일기장에 기록하는 사람. 몰래 울고 있는 사람의 손에 말없이 귤 한 조각을 쥐여주는 사람. 마흔이 되어 비로소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 사람. 임종을 앞둔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사람.
사람들이 하는 말은 일부러 하는 말, 근사해 보이려고 하는 말, 큰 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었으므로 운 좋게 그들의 말을 듣게 되면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더 노력해야 했다. 기억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마다 작고 귀한 것을 손에 쥔 기분으로 노트에 옮겨 적었다. 어떤 날은 노트에 적은 말이 하루의 일기가 되고 기도가 되고 다짐이 되었다. 처음 꾸는 꿈이 되고 믿고 싶은 미래가 되었다. 전하고 싶은 아름다움이 되었다. 이 노트는 늘 나와 가까운 곳에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펼쳐서 여러 번 읽어본다. 삶에서 용기와 사랑, 믿음이 필요한 순간은 자주 찾아오기 때문이다. 최근에 가장 좋아하는 말은 눈이 내리던 1월의 밤에 막내고모가 해주었던 말이다.
지난겨울엔 나를 키워준 두 사람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11월 말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두 달 만에 할머니도 따라 눈을 감았다. 할머니 유골함을 땅에 묻던 날은 몹시 추웠다. 엄마는 추위도 많이 타면서 왜 이렇게 추운 날 떠나느냐고, 둘째 고모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그날 밤은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고모들과 함께 보냈다. 피곤해서 눈을 감으면 안방과 거실, 주방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방은 어두운데 기억은 환했다.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이는데 거실에서 산소에 가져갈 조화를 손질하던 막내고모가 말했다.
"달님아. 자?"
"아니. 왜?"
"밖에 눈 와. 나가서 눈 구경해. 눈이 내리면 하늘에 있는 사람이 행복한 거랬어."
고모의 말에 겉옷을 대충 챙겨 입고 마당으로 나가보았다. 서울은 지겹게 온다지만 남쪽 지방에선 늘 기다리게 되는 귀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 오늘 같은 밤에 눈이 내리다니. 신기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불빛 하나 없는 산동네의 밤은 아주 깜깜해서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내게로 오는 듯해서 추운 줄도 모르고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까지고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 마당에서 할머니가 빨래를 널고, 담장에 걸터앉아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아끼던 화분에 물을 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당 한구석에서 밤 껍질을 말리던 모습이나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할머니의 익숙한 목발 소리도 생각이 났다. 할머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곳에선 나를 볼 수 있을까. 바람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내리는 눈이 우리가 함께 살던 집 마당 위로, 내 얼굴과 신발 위로 내려앉았다. 누군가 살며시 보내는 인사처럼. 조심스럽게 다녀가는 발걸음처럼. 그 밤에 나는 믿고 싶었던 것 같다. 눈이 내리면 하늘에 있는 사람이 행복한 거라는 막내고모의 말을.
어젯밤엔 노트에 적힌 말들을 읽다가 문득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순간이 떠올랐다. 내게로 오던 눈이 작고 환한 빛처럼 느껴지던 밤이. 그건 누군가가 들려준 말이 내게 빛으로 다가온 적이 있어서일 것이다. 하나, 하나. 이 삶을 계속 사랑할 수 있게 해준 작고 고마운 말들. 이제는 내게 온 이 말들이 내가 모르는 어느 먼 곳까지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그중 어떤 말들은 우리가 함께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게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는 노트가 있다. 내가 이 삶을 계속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준 말들을 모아둔 노트다. 지금껏 쓴 많은 글들이 이 노트에서 시작되었다. 다음에 쓰게 될 글 역시 여기에 있다. 세 권의 산문집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작별 인사는 아직이에요』 『나의 두 사람』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