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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기 선생님을 다시 만난 건 6년 전 겨울, 마산에 있는 독립영화상영관에서였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유일하게 상영하는 극장이라 친구와 함께 보러 간 날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 마음이 자잘하게 부서지는 여운을 느끼며 상영관을 나서려는데,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엔딩크레디트를 응시하는 한 사람이 보였다. 언뜻 보이는 얼굴이 익숙해 다가가 보니 이승기 선생님이었다. 방송국에서 처음 일을 배우기 시작했던 스물셋부터 영화사에서 일을 했던 이십 대 중반까지. 그를 어느 때는 방송 출연자로, 어느 때는 영화 관객으로, 어느 때는 영화자료 연구가로 만나왔다. 그는 지금껏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우연히 마주친 곳이 다름 아닌 극장이라는 사실이 더 반갑게 느껴졌다. 선생님과 함께 어둑한 극장을 벗어나 밝은 곳에서 안부 인사를 나눴다. 여느 때처럼 그는 회색빛 머리에 오래된 재킷 차림으로 내게 조금 전 본 영화가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어떤 배우의 연기가 좋았고, 어느 장면에서 눈물이 났는지 이야기하자 그는 여전히 극장에 남아있는 듯한 표정으로 영화의 어떤 점이 좋았는지 자세히 들려주었다. 덕분에 조금 전 본 영화가 내가 본 것보다 더 좋은 영화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고 돌아서는 길엔 선생님의 나이가 내 할아버지와 같은 나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2년이 지난 2019년 여름, 선생님을 인터뷰로 만날 기회가 생겼다. 기자로 참여하고 있던 한 매거진에그가 사랑하는 영화 이야기를 싣기 위해서였다. 흔쾌히 인터뷰를 허락해 준 선생님을 뵈러 그가 시민들에게 고전 영화 강의를 하고 있다는 문화원으로 찾아갔다. 그곳은 선생님이 평생 모아 온 1만 5천 점의 영화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얼굴을 알고 지낸 지는 꽤 되었지만 긴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으므로 두 시간 동안 인터뷰를 진행하며 선생님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섯 살에 처음 아버지를 따라 영화관에 가보았던 것이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극장에 몰래 숨어 들어가 영화를 보러 다녔던 기억. 고등학생 때 「작은 아씨들」의 배우 준 앨리슨에게 반해 팬레터를 보냈던 것과 꿈꾸던 유명한 영화감독은 되지 못했지만 매일 영화를 보고, 영화 자료를 모으고, 때론 책을 내면서 평생을 영화 안에서 살아온 이야기. 그런 선생님이 살면서 본 가장 좋은 영화는 역시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이었다. 영화는 '눈을 뜨고 꾸는 꿈'이라고 말하는 그와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였다. 그리고 그날 선생님은 이런 말을 내게 들려주기도 했다. 사람이 영원히 살 수만 있다면, 살아서 계속 계속 영화를 보고 싶다고.
그리고 1년이 지나 이번에는 선생님이 먼저 전화를 주셨다. 은행에 갔다가 우연히 내가 기사를 쓰는 매거진을 보게 되었고 반가움에 전화를 걸었노라고.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몇 해 전 내가 한 신문사에서 격주로 칼럼을 연재했을 때도 이번 칼럼도 잘 읽었다며, 어떤 부분이 특히 좋았는지 전화로 알려준 사람이기도 했다. 마침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던 때라 연말 인사를 드릴 겸 선생님과 저녁 약속을 잡았다. 평소 그를 좋아하는 동료 작가 두 명도 함께하는 자리였다. 저녁 장소는 선생님도 자주 가신다는 대패삼겹살 집이었다.
연말이라 그런지 가게는 고기 굽는 소리와 건배하는 소리, 사람들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그 소란 속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던 중 선생님이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곤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 하나를 우리 쪽으로 보여주었는데, 고려시대 병사 복장을 하고 가짜 수염을 붙인 선생님이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얼마 전 아는 영화감독이 병사 엑스트라가 필요하다고 해서 갔다가 기념으로 찍은 것이라 했다. 자갈밭에서 계속 무릎을 꿇고 있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며. 예상치 못한 사진에 나도 동료 작가들도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선생님의 모습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기꺼이 엑스트라가 된 선생님 모습이 재밌어서였다. 나중에 영화가 개봉하면 선생님을 찾아보겠다고 했더니, 그는 손사래를 쳤다. 똑같은 옷을 입은 병사들이 많아서 아마 본인만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며. 그러면서 예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지, 하고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10년 전쯤 있었던 일이다. 선생님은 평소 안면이 있던 감독의 첫 장편 영화에 난생처음 배우로 출연을 하게 되었다. 분량이 많지 않아 몇 줄 안 되는 대사를 달달 외워서 갔는데, 예상보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현장을 지켜보는 게 즐거워 견딜 만했다. 몇 달 후, 대형 극장에서 영화의 첫 상영회가 있던 날. 선생님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자신이 등장할 때를 기다리느라 영화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영화의 중반부에 이르러 드디어 자신이 등장할 차례가 되었을 때, 긴장된 마음으로 스크린을 지켜보았지만 다음 신으로 넘어갈 때까지 선생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선지 선생님이 나오는 분량이 편집된 것이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아주 짧은 순간 스치듯 지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 오직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선생님이 나오는 부분만을 기대했던 친구들은 승기야, 너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거냐고 옆자리에서 자꾸만 웅성댔다. 제일 속상한 사람의 속도 모르고 그랬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디트가 오를 때 선생님은 자신이 맡은 배역의 이름과 나란히 적힌 '이승기'라는 이름을 보았다. 그 이름을 눈여겨본 다음 친구들과 극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적잖이 실망한 친구들을 달래느라 주머니에 있던 돈을 다 털어 돼지 국밥과 소주를 샀다. 그게 바로 통편집이라는 거 아니냐고, 괜히 친구들 밥 사주고 술 사주느라 돈만 썼다며 선생님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이야기에 나도, 동료 작가들도 선생님을 따라 깔깔 소리 내서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웃는 동안 마음 어딘가에 무엇인가 부드럽게 새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여든 너머의 삶. 그 삶에도 여전히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도 여전히 나만 아는 기쁨을 간직하게 된다는 것. 그것을 잊지 말라는 것처럼.
"선생님은 하루하루가 심심할 틈이 없겠어요."
함께 웃던 동료가 말했다. 선생님은 매일 술을 마시면 심심하지 않다는 농담을 한 후에 자신이 알고 있는 비결은 매일 새롭게 배우는 것이라 일러주었다. 그는 매일 영화를 보는 것은 물론 언제나 머리맡에 책 다섯 권을 두고 잔다고 했다. 그중엔 젊은 작가가 쓴 책도 있고, 오랫동안 좋아한 원로 작가의 책들도 있다. 그리고 매일 여섯 개 신문사의 신문을 정독하는데, 두 곳은 구독해서 읽고 나머지 네 곳은 단골 카페에 가서 읽는다고도. 그렇게 매일 읽은 이야기 중에 재미있는 것을 골라 그때그때 만나는 사람들에게 들려준다고.
"그럼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지."
"뭐라고 하는데요?"
"승기야. 니는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서 좋다."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 그건 서른에도, 마흔에도, 여든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다짐 같았다. 마침 그 밤은 새해가 되기까지 열흘도 남지 않은 날이었다. 다가오는 날들을 알 수 없지만 앞으로 몇 번의 새해가 다가오든, 그때마다 나는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었다. 내게 이 말을 일러준 사람의 나이가 나보다 마흔여덟 살이 많은 여든셋이었다는 사실을. 여든셋의 나이에도 여전히 매일 사랑하고 꾸준히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내게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는 노트가 있다. 내가 이 삶을 계속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준 말들을 모아둔 노트다. 지금껏 쓴 많은 글들이 이 노트에서 시작되었다. 다음에 쓰게 될 글 역시 여기에 있다. 세 권의 산문집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작별 인사는 아직이에요』 『나의 두 사람』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