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2년(숙종28)~1789년(정조13).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제대(濟大), 호는 교교재(嘐嘐齋). 김수항(金壽恒)의 손자이다. 신임사화에 의해 백부 김창집(金昌集)이 사사될 때 전주로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풀려났다. 그 뒤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와 더불어 경서와 예설을 강론하였다. 1748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된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778년에는 특례로 우승지에 임명되었다.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이한진(李漢鎭) 등과 교유하면서 문예활동을 하였으며, 이한진이 편찬한 ≪청구영언(靑丘永言)≫(연민본)에 시조 2수가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