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7년(인조25)~1713년(숙종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능성(綾城). 당시 사회 전반에 걸쳐 불합리한 풍조가 일고 있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에 동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한 면모가 ≪해동가요≫와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몇 편의 시조에 나타나고 있다. 그는 시류에 어긋난 성품으로 1691년에 죄를 받았다가 3년 후 관직에 복귀했다. 1697년 남구만(南九萬)의 추천으로 음관(蔭官)이 되었고 공주목사(公州牧使)․황주목사(黃州牧使)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