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년(선조40)~1689년(숙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의 문인이다. 1633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잡혀가자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효종이 북벌계획을 추진함에 따라 등용되어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효종의 장례 때 복상 문제로 예송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은 후 남인에 대한 과격한 숙청을 주장하다가 서인 소장파들과 대립하여 서인의 분당을 초래하였다. 정계에서 은퇴해 화양동에 은거하던 중 장희빈의 아들 균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되었으며 사약을 받았다.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거유로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의 문하에서 권상하(權尙夏), 김창협(金昌協), 이희조(李喜朝), 정호(鄭澔)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저서로 ≪경례의의(經禮疑義)≫․≪심경석의(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朱文抄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