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9년(연산군5)~1547년(명종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미수(眉叟)․태수(台叟), 호는 규암(圭菴). 1521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간(臺諫)에 이르렀으나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1537년 김안로 등이 제거되자 복직, 대사성에 이르러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강론했다. 그 뒤 대사헌․이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나 다시 윤원형(尹元衡) 등의 미움을 사 1545년 을사사화 때 사사되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성리학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 ≪규암집(圭菴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