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년(선조20)~1671년(현종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 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1612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의 유생으로 권신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이듬해 경원(慶源)에 유배, 이어 기장(機張)에 이배(移配)되는 등 치열한 당쟁으로 힘겨운 일생을 보냈다. 1628년 문과에 장원을 차지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을 가르쳤다. 이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냈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이후 고향에 은거하여 풍류를 즐겼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고금영(古今詠)>․<증반금(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에는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며 <몽천요(夢天謠)>를 지었다.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복서․지리에도 통하였으며 저서로 문집 ≪고산유고(孤山遺稿)≫와 친필 가첩인 ≪고산가첩(孤山家帖)≫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