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3년(현종14)~1751년(영조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계형(季亨), 호는 회와(晦窩). 1708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정언 등을 역임하고, 경상우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충청도관찰사로 재직 중에 왕명을 어겨 효수형을 받게 된 박세명(朴世明)을 두둔한 죄로 파직되고 국문(鞫問)을 받았으나, 곧 석방되어 동지겸주청부사(冬至兼奏請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그러나 청나라에 가서 경종(景宗)의 병약함을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파직, 갑산에 위리안치 되었다. 영조 즉위 후 노론의 득세로 풀려나 승지로 복직하였다. 대사간 때 탕평책을 건의, 영조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에 한성부우윤, 도승지, 형조․공조․호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경사에 밝고 글씨를 잘 썼다. 유작으로 <영상윤인경비(領相尹仁鏡碑)>․<엄흥도묘갈(嚴興道墓碣)>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