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2년(중종7)~1562년(명종17). 조선 중기 학자.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운로(雲老), 호는 율정(栗亭). 김인후(金麟厚)의 문인이다. 아버지는 영암훈도(靈巖訓導) 무공랑(務功郞) 최숙(崔淑)이다. 1539년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였으나 홍패(紅牌)에 글자 한 자가 잘못 쓰여 무효처리 되었다. 이후 벼슬길이 막혀 초야에 묻혀 지냈다. 이후에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1555년 효행이 특이하다 하여 관직에 추천되었으나, 직책을 받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작품으로는 남송(南宋)의 문천상(文天祥)이 지은 <육가(六歌)>의 형식을 따른 <속문산육가(續文山六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