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7년(명종2)~1615년(광해군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흥성(興城), 자는 겸선(兼善), 호는 사촌(沙村). 주로 가학(家學)을 전해 받은 그는 경사백가(經史百家)에 두루 통하고, 당송팔가(唐宋八家)의 맥을 이었으며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일가를 이루었다. 사우관계로는 당시 덕행이나 문명으로 드날렸던 노진(盧禛)을 비롯하여 김복흥(金復興)․양사형(楊士衡)․최상중(崔尙重) 등을 들 수 있다. 1589년 문과에 급제한 뒤, 교서관저작을 거쳐 승문원박사가 되었다. 이어 공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전라도도사로 나갔으며, 1602년에는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금구현령을 자청해 나갔다가 그 이듬해에 실정으로 인하여 그만두었다. 이후 벼슬을 단념하고 시문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모방하여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 12곡을 지었으며, 저서로 ≪사촌집(沙村集)≫이 있다.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는 문집 권2 가사에 실려 있다. 제목이 “효퇴계선생도산육곡작강호연군가(效退溪先生陶山六曲作江湖戀君歌)”라 했는데, “전육곡(前六曲)”과 “후육곡(後六曲)”으로 나누어져 있고, 끝에 임자년(1612)에 쓴 작가의 후기가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