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4년(명종9)~1637년(인조1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 이황(李滉)의 문인들 사이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정부에서 학문적 권위를 인정한 산림(山林)에도 꼽혔다. 유성룡(柳成龍)․정경세(鄭經世) 등과 더불어 영남의 수많은 남인 학자들을 길러냈다. 유성룡 등의 천거로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받았으나, 1602년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정부의 주역(周易) 교정사업에 참여하고 이듬해 잠깐 의성현령으로 부임한 것 외에는 모두 사양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의병과 군량의 조달에 나섰으며, 패전 후 동해안의 입암산에 은거하였다. 저서로 ≪성리설(性理說)≫․≪역학도설(易學圖說)≫․≪용사일기(龍蛇日記)≫ 등과 문집 ≪여헌집(旅軒集)≫이 있다. 그의 문중에 내려오는 ≪장씨가장(張氏家藏)≫(필사본)에 시조 1수가 실려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