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1년(명종16)~1642년(인조20).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무하옹(無何翁).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別侍衛)가 되어 전공을 세웠다.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선전관․조라포만호를 지냈다. 도학과 조국에․자연애를 사상적 바탕으로, 천재적인 창작력을 발휘하여 전쟁 중에서도 시정(詩情)과 우국심에 넘치는 작품을 썼다. 특히 이덕형(李德馨)과 종유(從遊)하였는데, 1601년 이덕형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영천에 이르렀을 때, 시조 <조홍시가(早紅枾歌)> 등을 지었으며, 1605년 이덕형이 용진강(龍津江) 사제(莎堤)에 은거하였을 때 그의 빈객이 되어 <사제곡(莎堤曲)>․<누항사(陋巷詞)>를 지었다. 1635년 가사 <영남가(嶺南歌)>를 지었고, 이듬해 <노계가(蘆溪歌)>를 지었다. 그밖에 가사 <입암별곡(立巖別曲)>과 <소유정가(小有亭歌)>가 전하는데, 가사가 모두 9편이고 시조는 68수에 이른다. 말년에는 천석(泉石)을 벗하여 안빈낙도하는 삶을 살다가 죽었다. 그의 작품이 실려 전하는 문헌으로는 ≪노계집(蘆溪集)≫, ≪손씨수견록(孫氏隨見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