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9년(성종10)~1504년(연산군10). 조선 중기의 학자․시인. 본관은 고령(高嶺),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하여 15세 때 대제학 신용개(申用漑)의 눈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되었다. 1496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의 정자․수찬을 역임하고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성준(成俊)․이극균(李克均)의 죄상을 연산군에게 직고했다가 그들의 모함으로 투옥되고 파직 당했다. 이때부터 자연을 벗삼아 문학과 술로써 소일하며 독서에 열중하였고, 갑자사화로 동래(東萊)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어 사형 당했다.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대표적 시인이며, 절친한 친구인 이행(李荇)이 그의 시를 모아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