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3년(숙종19)~1766년(영조4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수(士受), 호는 삼주(三洲)․보객정(報客亭). 1732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1736년 사헌부지평으로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는 <시무십일조(時務十一條)>를 올렸다가 파직되었으며 후에 다시 양관대제학․예조판서․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글씨와 한시에 능하고 시조에도 뛰어났다. 특히 정계 은퇴 후 한강 학탄(鶴灘)의 향저에 머물면서 10여명의 가기(歌妓)를 양성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