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4년(선조27)~1646년(인조24). 조선 후기의 명장.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1618년 무과에 합격, 1620년 삼수의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으로 공을 세워 절충장군의 품계에 올랐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이 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행첨지중추부사겸우림위장(行僉知中樞府事兼羽林衛將)․방답첨사(防踏僉使)를 역임하였다. 이후 축성과 국방에 관한 여러 일을 수행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원병을 청했으나 김자점(金自點)의 방해로 결국 남한산성까지 포위되었다. 1643년 명나라에 망명, 명군의 총병(總兵)이 되어 청나라를 공격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이 때 국내에서 좌의정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에 연루설이 나돌아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청나라에서 송환되어 친국(親鞫)을 받다가 김자점의 밀명을 받은 형리에게 장살(杖殺)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