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연산군 4)~1557(명종 12). 조선 중기의 학자. ≪詩調≫(檀大本)과 ≪가곡원류≫계 가집에 ‘趙岦’으로 나오는데 ‘趙昱’의 오기(誤記)이다.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경양(景陽), 호는 용문(龍門)ㆍ보진재(葆眞齋). 1516년(중종 11) 생원ㆍ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조광조(趙光祖)ㆍ김식(金湜)을 사사하면서 학문연마에 힘썼다. 기묘사화 때 두 스승에 계루되었으나 연소하다고 하여 화를 면하였다. 그 뒤 형인 성(晟)과 함께 삭령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며 지냈다. 뒤에 선원전(璿源殿)ㆍ순릉(順陵)ㆍ영릉(寧陵) 등의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 3년상을 마치고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는데, 학문이 알려져 용문선생이라 일컬어졌다. 명종 때 성수침(成守琛)ㆍ조식(曺植) 등과 함께 천거되어 내섬시주부(內贍寺主簿)가 제수되었고, 이듬해 장수현감에 이르렀다. 시문과 서화에 능하였으며, 서경덕(徐敬德)ㆍ이황(李滉)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용문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문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