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6년(선조9)~1636년(인조1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1592년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 중, 그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의주(義州)에 갔다가 이항복(李恒福)의 주선으로 학문을 배웠다. 그해에 무과에 급제하여, 1621년에 만포첨사(滿浦僉使)로 국경을 수비했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황주(黃州)와 서울․안산(鞍山)에서 이괄의 군사를 무찔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정묘호란 때 부원수가 되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는데 반대해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왔다.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정통했으며 청렴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만운집(晩雲集)≫․≪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