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5년(중종10)~1575년(선조8). 조선 중기 유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용회(用晦), 호는 노계(蘆溪). 양팽손(梁彭孫)의 문인이다. 1534년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을사사화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호동(虎洞)에 은거하여 제자를 길렀다. 또한 취석정(醉石亭)을 짓고 이만영(李萬榮)․송인수(宋麟壽)․심광언(沈光彦)․양응정(梁應鼎) 등 제현(諸賢)들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경서를 연구하였다. 저서로 ≪노계집(蘆溪集)≫이 있으며, ≪성리언행(性理言行)≫ 등의 저술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작품으로 만년에 고향에서 자신의 회포를 드러낸 가사 <노계가(蘆溪歌)>와 시조 <노계명월가(蘆溪明月歌)> 1수가 전한다.